[성경 본문] 욥기 14:1-6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 그에게서 눈을 돌려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버려두옵소서
[주일 설교] 고난을 대하는 자세
🎤 주일예배 설교 스크립트 전문 (배준현 목사)
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성명교회 배준현 목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서 너무나도 감사하고, 이 시간 휘문 채플에서 동시에 예배드리시는 우리 성도님들께도 따뜻한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휘문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그래서 이번에 우리들교회에서 말씀을 좀 전해달라고 하셨을 때, 내심 '아, 내가 졸업한 휘문으로 갈 수 있으려나?' 하고 기대를 조금 했었습니다. (웃음) 그렇다고 지금 이 자리(판교)에 있는 것이 아쉽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번에 우리들교회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정말 너무나도 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저희 대구성명교회에서 세미나를 열어주시고 경상도 지역의 교회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겨주시니까, 우리 장로님들을 포함해서 온 성도님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해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를 바라며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면서 사진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분들 다들 잘 아시지요? 맨 왼쪽에 계신 분은 유재석 씨인데, 저희 교회에서는 성도님들이 저보고 유재석을 닮았다고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십니다. 심지어 TV에 유재석 씨가 나오면 교회 꼬마들은 "어! 담임 목사님이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웃음) 한술 더 떠서 어른 교인들은 "에이, 무슨 소리냐, 우리 목사님이 유재석보다 훨씬 더 잘생겼지!"라고 해주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반응은 아주 뜨뜻미지근할 줄 진작에 예상했습니다.
그 옆을 보시면 악동뮤지션(AKMU)이라는 친남매 혼성 그룹이 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이기도 하지요. 이 남매가 최근 한 방송 유퀴즈에 나와서 그동안 겪었던 심각한 '슬럼프'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특히 동생 이수현 씨가 굉장히 깊은 슬럼프를 지났는데, 미래가 두려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에 완전히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토리(히키코모리)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매일 배달 음식만 시켜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하는 어두운 시간을 길게 보낸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마침내 그 모든 슬럼프를 극복하고 새로운 앨범으로 멋지게 컴백을 했습니다. 방송에 나와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당당한 회복 스토리를 간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저 영상을 딱 보는 순간, 마음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 저 이야기 참 좋다. 다음에 설교할 때 예화로 한번 갖다 써야겠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제 스스로가 너무나도 얄팍하고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수현 씨가 슬럼프로 고통받고 살이 많이 찌고 삶이 피폐해져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여러 매체의 보도를 통해 이미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한창 고통의 터널을 지나며 아파할 때는 '설교 예화로 써야지'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보류하고, 유예하고, 그냥 덮어놓고 모른 척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회복되고, 멋지게 컴백하니까 그제야 '아, 이거 설교에 쓰면 딱 좋겠다'라고 계산하는 제 정욕적이고 얄팍한 모습이 너무 창피했습니다.
마치 누구의 성공 스토리, 회복 스토리만 쏙쏙 골라 따라다니는 기회주의자 같은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설교자란 삶의 지독한 고난과 아픔 속에 빠져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직면하도록 연결해 주는 작업을 하는 사람인데, 정작 진짜 문제와 씨름하는 어두운 한복판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보류해 버리는 설교자로서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깊은 고난 중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아, 도대체 이게 언제쯤 끝이 날까? 천국 가기 전에는 과연 해결될 수나 있을까?' 하는 깊은 절망감을 줍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면 도저히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교착 상태에 놓인 성도님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이 욥기 14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인생의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마주했을 때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함께 깊이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보통 욥기에서 가장 설교하기 좋은 본문은 앞부분인 1~2장이나, 모든 고난이 싹 해결되는 마지막 42장입니다. "여러분, 욥이 이런 재앙을 당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견뎠더니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도 이렇게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설교는 전하기도 쉽고 듣기에도 아주 편안합니다.
그러나 정작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본문은 이런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4장은 욥이 고난의 한복판, 가장 지독한 밤을 통과하며 뱉어내는 날 것 그대로의 토로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보통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읽어 내려갑니다. 다 알고 보는 것입니다. 욥이 14장에서 아무리 괴로워하며 몸부림쳐도, 마음 한편으로는 '욥아, 조금만 참아봐. 어차피 42장 가면 두 배로 복 받고 다 해결돼'라는 여유를 부립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말씀의 텍스트 안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가 욥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합니다.
욥기 14장의 상태는 한마디로 '인생의 깊은 밤 삼경'과 같습니다. 몸이 몹시 아픈 환자들은 새벽 2시, 3시에 통증 때문에 자주 잠에서 깨어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가족들도 다 자고 있고, 간병인도 쉬고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나 홀로 지독한 통증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합니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극심한 외로움이 동시에 들이닥치는 절망의 시간입니다.
42장의 해피엔딩을 전혀 모른 채, 해결될 기미가 1%도 보이지 않는 광야에서 욥은 혼자 외롭게 고통을 씹어 삼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위로해 주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은 "네가 이렇게 유례없는 비참한 저주를 받은 데에는 분명히 감추어 둔 죄가 있기 때문이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빨리 불고 회개하라!"며 사정없이 정죄의 바늘로 심장을 찔러댑니다.
이 기가 막힌 고난의 한복판에서 욥은 1절과 2절을 통해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이 고난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실상은 한마디로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나도 '하찮고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짧은데, 그 짧은 생애 동안 걱정과 근심은 쉴 새 없이 가득하게 밀려옵니다. 마치 하루 살다 사라지는 하루살이가 온갖 세상 걱정을 가득 안고 끙끙 앓고 있는 모습처럼,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인간의 실상이 이토록 가볍고 허무하다는 고백입니다.
어쩌다 인생의 전성기를 맞아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는가 싶다가도, 이내 금방 시들어버리고 그림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욥은 3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따져 묻습니다.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하나님, 들풀 같고 그림자 같고 하루살이처럼 하찮은 인간이 죄를 지어봤자 얼마나 대단한 죄를 짓겠습니까? 악을 행해봐야 주님의 우주적인 주권 앞에서 얼마나 대단한 악을 행하겠습니까? 어차피 시들어 없어질 허무한 인생인데,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먼지 같은 존재를 불꽃 같은 눈으로 낱낱이 눈여겨보시며 가혹하게 간섭하시고, 재판하시고, 온갖 재앙과 고난을 주시며 상관하십니까? 크신 하나님께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토로하는 것입니다.
4절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인간은 아담의 원죄 아래 본질적으로 더러운 한계를 지닌 존재인데, 주님은 내게서 도대체 무슨 대단하고 선한 것이 나오기를 기대하셨기에 이토록 모질게 연단하시냐는 외침입니다.
5절에서는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이라고 선포합니다. 주님이 인생의 한계와 선을 딱 그어놓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 규례를 절대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지난주 김양재 목사님 주일 설교 말씀처럼, 유다의 악한 왕 아몬이 온갖 죄를 짓다가 겨우 2년 만에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해 인생이 끝난 것이 오히려 구속사적으로는 죄를 더 짓지 않게 하신 축복의 그으심이었습니다. 인간은 주님이 그으신 한계를 결코 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욥이 내린 결론은 6절입니다. "그에게서 눈을 돌려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버려두옵소서"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십시오! 불꽃 같은 시선으로 나를 주시하며 간섭하지 마시고,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품꾼처럼 그냥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내 정해진 날이 차면 조용히 갈 수 있도록 나를 그냥 홀로 내버려 두십시오!" 이것이 고난에 철저히 질려버린 욥의 비참한 도두리이자 외침입니다.
욥은 21절과 22절에서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 당한 고난이 너무 극심하고, 내 살이 찢어지게 아프고, 내 영혼이 깊은 애곡 속에 빠져 있으니까 내 자녀가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지 비천하게 떨어지는지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고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해할 수 없는 연단의 고난을 욥에게 허락하시고 몰아넣으신 분이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20절에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주님이 인생을 철저히 꺾으시고 쫓아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첫 번째 적용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인생의 고난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나의 아픔과 질병, 고통이 너무 크다 보니 주위 지체나 가족들을 전혀 돌아보지 못한 채 영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이 깊은 고난의 한복판에 밀어 넣으신 하나님을 향해 여러분은 지금 어떤 태도로 대하고 계십니까?
욥기는 이런 처절한 욥의 넋두리와 불평을 아주 길고 지루하게 성경 한가운데 기록해 두었습니다. 어떤 평론가는 욥기가 단 세 줄이면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욥이라는 의인이 있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 마침내 다 해결되고 갑절의 복을 받았다." 이렇게 세 줄이면 끝날 이야기를, 성경은 왜 읽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욥의 원망과 친구들과의 지루한 논쟁을 고스란히 다 담아두었을까요?
우리가 욥기를 읽을 때 곤혹스러운 진짜 이유는, 이 말씀 속에서 고난을 당장 이겨낼 수 있는 명쾌한 '해결책'이나 지름길을 자꾸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욥기는 고난의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어마어마한 고난은 욥이 무엇을 잘못했거나 실수를 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을 기억해 보십시오. 천상 회의가 열렸을 때 하나님은 사탄 앞에서 욥을 대단하게 자랑하셨습니다. "너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의 고난은 그의 죄나 흠집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의 온전함을 너무나 신뢰하고 자랑하셨기 때문에 허락하신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인간적인 인과응보의 시각으로 욥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듭니다. 그래야 내 머리로 하나님이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욥이 42장에서 비로소 눈으로 주를 본다고 고백했잖아.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하나님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 귀로만 들었던 영적 문제가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벌을 받았지!"라며 욥을 정죄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는 온전했고, 정직했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욥은 아무런 직접적인 이유 없이 이 거대한 고난을 만났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저는 인생의 지독한 겨울을 지나고 계시는 성도님들께 감히 이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고난의 원인을 내 안에서, 혹은 타인에게서 성급하게 찾아내어 이 환경을 어설프게 빨리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지 마시고, 때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고난의 자리 한복판에 묵묵히 머물러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 아픔의 무게를 제가 감히 다 헤아릴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고난은 즉각적인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고난 속에 머물며 주님의 주권을 온전히 배우게 하시기 위해 허락하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잔꾀로 쉽게 해결하려고 하니까 영적 직분을 내팽개치고, 절교를 하고, 이혼을 선포하고, 환경을 도피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고난이라면,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 묵묵히 그 고난을 견디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왜 그토록 가혹하게 욥을 몰아세우며 정죄했는지 아십니까?
고난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각이 너무나 '편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무조건 나쁜 것, 부끄러운 것, 죄의 결과물이야. 그러니까 너는 빨리 회개해서 이 고난을 끝내야 해!"라는 단순한 도식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어 자초한 고난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은 죄의 크기는 요만큼인데, 내게 밀려온 고난의 크기는 이만큼 거대해서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욥기적 고난의 측면이 우리 모두의 삶에 다 존재합니다. 이때 내 고난의 원인을 자꾸 "내가 못나서 그래, 내 잘못이야"라며 나 자신에게만 화살을 돌리면 나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학에 빠집니다. 반대로 "저 배우자 때문에, 부모 때문에, 이 더러운 세상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해"라며 타인에게 화살을 겨누면 이웃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느냐"며 주님께 분노의 화살을 쏘아대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가장 위대한 계명이, 고난의 원인을 기어코 찾아내어 해결하려는 나의 칼날 때문에 다 짓밟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때로는 고난을 그냥 고난으로 묵묵히 안아야 합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환경의 문제도 아니라, 그저 내 인생 광야에 허락된 고난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 가득한 부르짖음에 반드시 응답하시고 살피시는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더 간절히 눈물로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고난 자체가 무조건적인 저주나 악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정결하고 고귀한 '선(Good)'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1~2절에서 자신의 생애가 풀의 꽃처럼 짧고 허무하며 그림자처럼 금방 지나간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욥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피조물인지를 처절하게 깨닫고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가장 인간적이고 겸손한 사람다운 사람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비인간적이고 괴물처럼 변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가 누리는 이 물질의 번영, 건강, 전성기가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며 내 힘으로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을 때입니다. 그 교만의 정점에서 인간은 무서운 괴물이 됩니다. 그러나 고난의 밤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내 한계를 깨닫고, 4절 말씀처럼 존재론적인 나의 더러움과 원죄를 보게 되며, 6절의 고백처럼 주님이 그어놓으신 주권의 선을 인정하는 진짜 지혜로운 성도로 거듭나게 됩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고난을 당장 쳐부수고 가출하라고 하지 않고, 그 고난의 자리를 말씀으로 살아내며 머무르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통과하는 고난의 현장 속에 소망이 있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난 밖에서 "일로 나와봐, 힘내!"라고 소리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독한 고난의 한복판, 가장 낮고 더러운 말구유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고난을 단 한 순간도 야비하게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동물보다 무력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 자라나셨고, 삼십 세가 되기까지 인간의 모든 고통과 목수의 노동을 경험하셨습니다. 3년의 공생애 동안 온갖 인간들의 배신과 조롱, 채찍질과 십자가의 고통을 고스란히 통과하셨습니다. "나 곧 죽고 부활할 테니 이 끔찍한 십자가 고난은 대충 빨리 대리인 시켜서 패스하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잔인한 고난의 쓴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묵묵히 다 마셔내셨습니다. 그 고난의 주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당한 고난의 한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결코 나 혼자 이 어둠을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완벽하게 공감하시고 붙드시는 예수님과 함께 이 고난을 견뎌내야 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적용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고난을 만났을 때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그저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경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여 본 적이 있습니까?
비록 당장 내 눈앞에 기적적인 해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고난 속에 주님의 세밀한 뜻이 있음을 고백하며 머무를 수 있습니까?
나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고독한 고난의 한복판에서, 내 곁에 찾아와 함께 울며 이 통증을 겪어주고 계시는 예수님이 바라보이십니까?
제가 이번에 우리들교회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김양재 목사님이 고난을 대하시는 구속사적인 태도에 정말 큰 도전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의 눈물 어린 가감 없는 간증들을 보면서, '어떻게 삶의 지독한 고난들을 저렇게 말씀으로 소화해 내고 거룩하게 해석해 갈 수 있을까? 해석이 되니까 저렇게 가정이 살아나고 치유가 일어나는구나!' 하는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슬픔과 아픔이 가득한 이 시대에 우리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태도가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대구에 내려가면 우리 교회에 어떻게 이 묵상을 적용할지 아주 깊은 영적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세미나 기간 중에 우리들교회의 한 부부 목장을 직접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정말 신선하고도 거대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웃음) 자리에 앉아 나눔이 시작되는데, 한 성도님이 아주 가벼운 이야기로 운을 떼셨습니다. 제가 성도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설교 원고에는 과일로 비유해서 적어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블루베리 같은 작은 나눔이었습니다. "아, 제가 이번 주에 너무 바빠서 주일 예배 본당에서 온전히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블루베리처럼 가볍게 나눔을 하니까, 목장의 인도자(목자) 분이 대뜸 정색을 하면서 소리를 높이셨습니다. "지금 목사님 참관 와 계시다고 거룩한 척 쇼하는 거요? 말 똑바로 하이소! 이번 주에 당신 수박(치명적인 오픈) 안 꺼내놓을 거요?"라고 다그치는 것이었습니다. (일동 웃음)
사과나 망고 단계를 확 건너뛰고 갑자기 거대한 '수박'을 꺼내라는 말에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 성도님이 주저주저하다가 꺼내놓은 진짜 삶의 수박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이혼하고 확 죽어버리려고 하다가 룸살롱에 가서 밤새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행했습니다"라는, 도저히 일반 교회에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추악한 치부와 삶의 고난을 그대로 드러내어 오픈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자분이 저를 딱 보시더니 "목사님, 용어 잘 모르시지예? 집사님, 목사님 알아듣기 쉽게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다 설명해 드리이소!" 하시는 바람에 제가 너무 당황해서 "아닙니다! 저 다 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웃음) 사실 속으로는 용어를 전혀 몰라서 '나중에 우리 대구 내려가서 컴퓨터 AI한테 몰래 검색해서 물어봐야겠다'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그 용어마저 지금은 다 까먹어버렸습니다. (웃음)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기가 막힌 막장 같은 삶의 죄 고백과 고난의 나눔을 듣는데 목원들이 다 같이 배를 잡고 껄껄껄 웃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자리에서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아, 이 심각한 범죄와 고난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같이 따라 웃어야 하나? 웃으면 상처가 될 텐데 진지하게 있어야 하나?' 진지한 표정으로 굳어 있으니까 저쪽에서 "목사님 많이 놀라셨지예? 이해가 안 되시는가 보네, 설명해 주이소!" 하시고, 그렇다고 웃자니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맸습니다.
나눔이 끝나고 너무 궁금해서 성도님께 슬쩍 여쭈어보았습니다. "집사님, 세상 어디에서도 못 할 이런 아픈 치부와 고난을 고백하실 때, 목원들이 진지하게 들어주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대놓고 박장대소하며 웃어주는 게 좋습니까?" 그랬더니 성도님이 단호하게 "목사님, 깔깔 웃어주는 게 훨씬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소설가 김해란 작가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그 작가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사연들을 소설로 기가 막히게 담아내는 분인데, 신기하게도 비극적인 소설 문장 중간중간에 굉장히 위트 있는 유머 코드를 많이 심어놓습니다. 한 기자가 "이렇게 아픈 소설에 왜 자꾸 농담과 유머 집어넣습니까?"라고 묻자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겪고 있는 삶의 고난과 비극을 너무 진지하고 비장하게만 위로하면, 그 위로를 받는 사람의 마음속에 큰 영적 부채감과 빚진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너무 겁지도 않게, 너무 차갑지도 않게, 그 고난의 무게에 짓눌려 죽지 않도록 유머라는 도구로 숨구멍을 뚫어주는 것입니다."
제가 평소에는 그 인터뷰를 100%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우리들교회 목장에 참관하면서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부패하고 썩어서 온 영혼과 육신을 망가뜨렸을 그 지독한 고난과 죄의 찌꺼기들을, 공동체 앞에서 눈물로 드러내고 서로 웃고 넘기며 소화해 내는 복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고난당한 영혼들이 말씀 안에서 서로를 살려내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예배의 현장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부끄러운 유학 시절의 고난 이야기를 짧게 나누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 지 딱 8개월 만에 가지고 간 돈이 완전히 바닥을 쳤습니다. 아내와 무섭게 먹어 치우는 어린 아들 둘, 그리고 장모님에 장모님이 키우시던 강아지 한 마리까지 온 가족을 책임지고 호기롭게 떠난 유학길이었는데 완전히 알거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유학을 보내놓으셨으면 재정을 주셔야지 굶겨 죽이실 작정입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주님은 묵묵부답이셨습니다. 너무 자존심이 상했지만 한국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해서 "아버지, 다른 게 아니라 손주들이 지금 굶어 죽어갑니다"라고 하면 당장 돈을 보내주시겠다는 인간적인 잔꾀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주신 큐티 본문이 시편 42편 "너는 네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인간적인 지름길의 전화를 과감히 포기하고 하나님께 더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아내가 안타까워하며 일을 나가겠다고 했지만, 제 못난 유교적 자존심으로 가장인 내가 해결할 테니 기다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지금 같으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서 나가서 은사와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주십시오!" 했을 텐데 그때는 참 미련했습니다. (웃음)
간절히 엎드려 구했을 때 주님이 식당 일자리를 하나 허락해 주셨는데, 무려 하루에 12시간씩 서서 일하는 중노동이었습니다. 거대한 식재료 포대를 들어 옮기고 뜨거운 불판 앞에서 온종일 칼질을 하느라 손에 칼자국과 화상 흉터가 가득해졌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주방에서 요리 보조를 자처한 이유는, 요리를 하면 시간당 딱 1달러를 더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돈으로 1,200원 정도 되는 돈을 더 벌겠다고 필사적으로 불판 앞에 섰습니다. 하루 12시간 노동이 끝나고 퇴근할 때가 되면 손가락이 경직되어 도저히 펴지지 않았습니다. 손에 지독한 영구 장애가 생길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렇게 월, 화, 수 3일 동안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목, 금 이틀 동안은 남들이 일주일 내내 공부한 분량을 밤을 새우며 몰아서 공부했습니다. 주경야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온종일 중노동을 하고 책상에 앉으면 영어 원서 활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괴로운 상태에서 매주 15장, 20장씩 영어로 페이퍼를 써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차로 2시간 반이 걸리는 버지니아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사역지까지 온 가족의 짐을 이삿짐처럼 싸 들고 내려가 다른 사람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파트타임 사역을 했습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일주일을 반복하며 1년쯤 지났을 때, 정말 미칠 것 같은 한계가 찾아왔습니다. 섭씨 40도가 육박하는 대낮에 뜨거운 대형 불판 앞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한 번도 앉지 못하고 일을 하다가, 오후 4시쯤 되자 정신이 아득해지며 더위를 먹고 주방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도저히 몸이 일으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밤 9시 반 퇴근 시간까지 겨우 악으로 버틴 뒤, 집으로 돌아가는 1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여러분, 운전하면서 통곡하면 시야가 가려져서 정말 위험합니다. (웃음)
너무 억울하고 울분이 터져서 하나님을 향해 존댓말도 아니고 반말도 아닌 이상한 말로 대들었습니다. "하나님! 나한테 도대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내가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신학 공부하러 왔는데,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부려 먹으시고 손가락도 안 펴지게 만드시면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에 안 왔습니다!"라고 대성통곡을 하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때 주님이 제 마음속에 아주 세밀하고 고요한 음성으로 툭 한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준현아, 너 유학 생활이 이렇게 끔찍하게 고생스러울 줄 미리 다 알고 있었으면, 그래도 유학 갈래?"
그 음성을 듣는데 인간적으로 더 화가 나고 비참했습니다. (웃음) 당연히 제 대답은 "안 갑니다! 절대 안 오지요!"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집스러운 대답을 뱉는 순간, 제 마음속에 1년 동안 토요일, 일요일마다 왕복 5시간을 운전해 내려가 목양했던 사역지의 청년부 아이들 9명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 하나님, 비록 내 육신은 찢어지게 아프고 손가락은 안 펴지지만, 이 고난을 통과해서 그 외롭고 죽어가는 이민자 청년 아홉 명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 나 1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도 이 고생 똑같이 다 겪고 유학 올 것 같습니다. 다시 오겠습니다.'라는 눈물의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사랑 안에서 완벽하게 해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돈 버는 식당 일은 줄일 수 없었기에, 목·금 이틀 동안 공부하던 시간 중 하루를 과감히 쪼개어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대학 기숙사로 청년들을 만나러 찾아갔습니다. 그 외롭고 미래가 불확실해 방황하는 유학생 청년들과 함께 밥을 먹고, 붙잡고 울어주며 고난을 함께 공감하고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두 달 동안 아홉 명의 아이들을 정성껏 만나 말씀으로 위로했더니, 아이들의 눈빛이 희망으로 채워지며 완전히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 친구들이 신기해하며 "나도 너 다니는 교회 한번 가보고 싶다"며 네 시간 거리의 교회를 토요일마다 따라왔습니다. 9명이던 청년부가 순식간에 25명으로 부흥했습니다. 장년 성도 80명 모이는 이민 교회에 청년만 25명이 넘게 모이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청년들이 살아났지만, 진짜 살아난 것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월·화·수 식당에서 손이 다 타들어 가도록 노동을 하고, 목·금 밤을 새우며 고통스럽게 페이퍼를 써내도, 토요일과 주일에 사역지에 가서 죽어가는 영혼들과 말씀으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으면 주중에 겪었던 모든 지독한 고난의 피로가 예수의 보혈로 흔적도 없이 싹 씻겨 내려가는 부활의 능력을 매주 체험했습니다. "내가 월요일에 뭐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지? 목요일에 왜 죽고 싶었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신비한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독한 고난의 터널 속에서 저를 완전히 깨뜨리시고 빚어주셔서, 저희 학교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3년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패스하고 수석으로 귀국하게 하시는 신기록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적용 질문을 드립니다.
나에게 허락된 삶의 고난을 인본주의적으로 도망치지 않고, 말씀으로 정직하게 해석해 내기 위해 매일 말씀 묵상(QT)과 기도의 자리를 지켜내고 계십니까?
목장 공동체에서 지체들이 눈물로 나누는 지독한 치부와 고난의 고백을 들을 때, 내 교만한 판단의 잣대를 내려놓고 영적인 형제 의식으로 함께 아파하며 공감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 다짐은 "내가 앞으로 동서남북 방향 중에 미국이 있는 방향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였습니다. (웃음) 유학 시절의 고난이 인간적으로 너무나 아프고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 나를 깨달으시게 하려는 뜻은 알겠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나를 비참하고 아프게 하셨어야만 했습니까?"라는 응어리가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들교회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고 오늘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면서, 수십 년 동안 묶여 있던 제 마음의 마지막 고난의 응어리가 말씀 안에서 완벽하게 해석되고 풀어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아, 주님이 나 같은 자도 목회자로 쓰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교만 덩어리인 나를 깨뜨려 사람다운 목자로 빚어내시려고 그 고난의 자리에 머물게 하셨던 거구나!"
고난은 우리의 생각대로 당장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주권을 배우게 하는 거룩한 영적 자양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잔인한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통과하셔서 우리에게 찬란한 부활의 생명을 선물해 주신 것처럼, 오늘 여러분에게 허락된 인생의 르바임 골짜기, 나곤의 타작마당 같은 고난을 말씀의 법대로 묵묵히 견뎌내십시오. 기꺼이 통과해 내십시오. 그리하여 마침내 고난을 이기고 치유와 생명을 선포하는 찬란한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멘.
출처: https://youtu.be/XHQawbid0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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