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마가복음 5:25-34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설교 요약] 인생의 혈루가 마르고 평안을 누리는 비결
미취학부 헌신예배에 오신 우리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미취학부 아이들 너무 귀엽죠? 네, 우리들교회에서 가장 작고 어리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가족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가장 1등 공신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저희 미취학부는 판교, 휘문 채플, 그리고 광주와 대구 미취학부까지 천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예배하고 500여 명의 청장년 선생님들께서 함께 섬겨 주시는 부서입니다. 생각나실 때마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어린 시절부터 마음 밭에 세속사가 아닌 구속사의 씨앗을 잘 뿌리고 취학부, 청소년부, 청년부로 자라나기까지 30배, 60배, 100배의 구원의 결실을 맺는 친구들이 될 수 있도록, 아기 때부터 듣는 이 한 주 한 주의 말씀이 살아가며 중요한 순간에 기억나서 언제든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는 기억나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부터 설 명절이 시작이 됩니다. 지난 주일 예배 때 가족에게 구원을 전하는 시간이 되자고 결단하며 기도했는데 한 주 동안 모든 준비를 잘 마치셨나요? 오늘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시는 말씀은 어떤 이유가 있든 이유가 없든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가고 싶지 않은 시댁이든, 여전히 불편한 처가이든, 명절이어도 혼자 지내야 하는 곳이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내 생활의 터전인 그곳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평안히 갈 수 있을까요?
평안히 가려면 첫째, 내가 혈루증 앓는 여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25절, 26절입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던 차에.
" 제가 이 혈루증 여인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를 더 묵상하게 되었어요.
분명 혈루증 여인이 나오기 전날의 본문에 회당장의 딸을 고치러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혈루증 여인을 양육하시고 다시 회당장의 딸을 만나러 가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어요.
왜 중간에 이렇게 혈루증 여인이 끼어 있었을까 묵상하다 저에게는 더 깊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이었던 소녀는 12살이었습니다. 오늘의 여인도 병으로 시달린 시간이 12해입니다. 성경에서 12라는 숫자는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곱한 수로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특히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것은 마태나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어요.
마가는 왜 기록을 했을까요? 이 두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면 사람이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병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부유했던 회당장의 딸이었어요. 한 사람은 이름조차도 드러나지 않는 12년 동안 혈루증에 시달린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볼 때 신분으로는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모두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각각의 생활과 형편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두 사람처럼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그 어떤 사람도 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치유할 수 없고 도와서 해결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혈루증은 어떤 병일까요? 부인과 질병으로 만성적인 하혈을 하는 병으로, 당시의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병이 여인을 아주 심각하게 만들었어요. 여인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수도 있고, 누구든지 이 여인과 함께했거나 여인이 앉았던 곳에 앉거나 접촉만으로도 함께 부정해지기 때문에 목욕을 하고 의복을 빨아야만 했습니다. 혼자만의 병으로 끙끙 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소외를 당해야 했어요. 그 당시 문둥병자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배제되었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당연하고 정신적인 고통까지 당하며 이 병을 고쳐보고자 했지만, 애쓸수록 26절의 표현처럼 많은 의사에게 엄청난 괴로움까지 당해야만 했습니다.
마가는 이 여인이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고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더 중해졌음을 알리며, 예수님께 한 여인이 나오는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저의 멈추지 않았던 혈루에 대해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들교회에 와서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나와 원가족을 객관화했던 것과, 객관화 작업이 이루어지니 자연스럽게 질서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었고 그 질서를 원가정과 지금의 내 가정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었어요. 30여 년을 믿고 살아왔던 나의 틀이 깨어져야만 했고, 때로는 그 깨어져 가는 시간들이 아파서 멈추고 싶기도 했습니다. 깨어질 때마다 내 지나온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그만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말씀대로 믿고 조금씩 적용해 보는 것뿐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만 먹어도 그 말씀이 제 삶에 실제로 믿어지고 살아지고 누려지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친언니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어요. 저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이야기들을 설교로 한번 하고 나서 제가 언니한테 이야기했어요. "언니 내가 옛날 얘기 하면 사람들이 놀라더라." 그랬더니 저희 언니가 "정말 그건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하긴 지금의 널 보면 안 믿어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깔깔 웃고 한참을 웃었어요.
왜 웃음이 났냐면 결혼 전에는 제가 나름 관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유산소는 기본으로 했어요. 그리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뭔가 루틴을 하지 않은 것처럼 굉장히 불편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밀가루는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옷도 예쁘게 입는 거 좋아하고 신발과 가방까지 맞춰서 좀 피곤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지금은 밀가루를 찾아 먹어요.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가서 물어봐요. "어떻게 하셨어요?" 그런데 저희 언니가 항상 저한테 "야 네가 알고 있는 거 그거 하나만 꾸준히 하면 돼"라는 대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처녀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고 하시는 게 정말 맞는 말씀 같습니다. 저는 사람들도 좋아하고 막내로 자라면서 예쁨도 받고 지냈기에 관계에서 늘 주목받고, 소위 '과대표'까지 하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믿음이 있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저에게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찾아와 주셨어요. 죄인이라는 혈루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던 저에게 예수님이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결혼의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결혼까지 이루어졌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안 좋아지는 환경을 보면서 "아 이제 진짜 내 인생은 끝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나는 되는 게 하나도 없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시부모님도 참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때는 저만 집중해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 다른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방 안에 누워 있다가도 밖에서 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앉아 있고, 씻어도 안에서 물기가 있는 채로 옷을 입어야 했고, 내가 무언가를 먹고 싶을 때 먹지 못하고 TV를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정말 자유롭게 살았던 제가 자유로운 일상이 되지 않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침에는 제가 밥을 챙겨 먹는데, 나름 식단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부엌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데 시부모님이 함께 계시다 보니까 그런 준비들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아버님이 새벽기도가 끝나고 오시면 거실에서 쉬셨기 때문에 제가 나가서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입에도 대지 않던 빵을 전날 사 놓고 그냥 방에서 먹는 거예요.
예전에는 운동도 꼬박꼬박하던 제가 에너지가 없으니까 움직일 수도 없었어요. 남편은 점점 웃음도 잃어가고 눈물만 많아지고 한풀이만 하던 저에게 "운동이라도 하자, 앞에 나가서 좀만 걷고 오자"라고 말했지만, 몸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 바에 죽는 게 낫겠다"라고 항상 말하는 저에게는 운동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었어요. 그렇게 점점 살이 찌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너 행복한 결혼 생활하고 있구나" 이런 소리를 들어야 되는데, 친구들을 만나면 "너 무슨 일이야? 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라고 묻는 질문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졌습니다. 한창 행복해야할 신혼에 있어야 할 내가 웃음은 사라지고 옷은 맞는 게 없으니 재미도 없어지고 사람을 피하게 되니,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받으며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혈루 여인처럼 죽음을 묵상하며 살아가니 그 어떤 것도 제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거울을 보지 않았어요. 스트레스로 얼굴에는 여드름같이 빨갛게 올라오기 시작했고 살이 쪄서 예쁜 옷들은 맞지도 않아 화가 나는데 얼굴까지 빨갛게 뒤덮여 버리니 죽고 싶다고만 외치는 저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살찐 게 누구 탓일까요? 본인 탓 맞습니다. 내가 먹어서 살이 찐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죄가 깨달아지지 않으니 탓을 돌려야만 했어요. "이렇게 살이 찐 것도 다 너를 만나서 내가 살이 쪘고, 이런 상황에까지 왔으면서도 사실을 오픈하지 않은 시부모님의 탓이라"며 분노의 혈루까지 더해졌습니다
. 이때는 제가 20kg까지 찐 상태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포기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 엘리베이터에 제가 잠깐 탔는데 제가 있는 줄 모르셨던 거 같아요. 어떤 분이 "아니 그래서 지금이 찐 상태라는 거야, 아니면 지금부터 20kg가 빠졌던 상태라는 거야?" 하는데 제가 뒤에서 대답을 해 드리고 싶었지만 그냥 뒤로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급기야 가족들 외에는 그 어떤 누구도 만나지 않고 철저하게 스스로를 숨기며 내 인생은 끝났다고 숨어 있던 저였습니다. 나에게 혈루가 있음을 알지도 못했기에 고침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되는 이 환경에 익숙해지니 간절함이나 절박함도 아예 느끼지 못하고 내 혈루의 근원을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린 채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삶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나에게 마르지 않는 혈루가 있음을 인정하나요?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낫길 원하는 혈루증은 무엇인가요? 내 혈루의 근원을 다른 사람에게 탓하며 나도 죽고 남도 죽이고 있지는 않나요?
평안히 가려면 둘째, 그의 옷에 손을 대어야 합니다.
27절에서 29절 말씀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아무 효과도 없고 갖고 있던 모든 재산도 사라진 채 구원의 소망은 전혀 없는 자포자기한 상황에 있었을 이 여인에게 한 소문이 들리게 됩니다. 이 여인에게 이런 고통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안락한 삶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해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어떤 소망도 갖지 못하니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소식에 반응하며 움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렇게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소식에 반응하는 이 여인의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그래서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세속사적으로는 불행이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구속사적으로는 예수님을 붙잡게 되니 고난이 축복이란 말이 인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소문은 들었지만 앞다투어 무리에 끼어 만나러 갈 수 없었습니다.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갔어요. 이 당시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더욱이 신체를 접촉하기 위해 접근하는 일은 아예 금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공중 앞에 나와서도 안 되었어요. 더욱이 다른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눈치챌 수 없도록 무리를 이용해서 뒤로 갔습니다.
그랬던 이 여인을 구원에 이르게 했던 행동이 뭐였을까요? 바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이것은 원어의 표현으로 겉옷이라고 번역했지만 제대로 번역하면 옷의 가장자리입니다. 여인이 예수의 옷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게 아니고 단 한 번만 스치듯 옷가에 손을 대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여인의 믿음과 그녀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로 고쳐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혈루의 근원을 남편과 시댁에게 탓을 돌린 채 분노의 혈루로, 연민의 혈루로 내가 죽어가는지도 모르고 있던 저에게 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남편이 그때 당시 외부에서 함께 사역했던 우리들교회의 사역자분이 "재호 형제랑 꼭 함께 사역하고 싶은데 사역을 지원해 보지 않겠냐"는 소식이었습니다. 무리한 성전 건축으로 사례비를 줄 수 없게 되어서 남편과 제가 투입되어 함께 사역했던 아버님 교회는 정리가 된 상태에서 이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혜연아 내가 너를 아는데 너는 이렇게 있을 사람이 아니야, 우리가 다시 일어나야지. 마지막 내 부탁이야 우리 같이 지원해 보자, 우리가 살아야지." 누구보다 제일 절박했을 남편에게 들렸던 그 한마디는 "우리가 살아야지"였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으로, 그것도 이 모습을 첫인상으로 기억할 새로운 환경에 간다는 것은 저에게는 도전이 아닌 사형 현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누구보다 그 상황을 남편은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함께 하자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1차, 2차, 3차 면접까지 함께 왔어요. 그래서 저는 더 안심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과 함께라면 사형 현장이 아니라 도전해 볼 수 있겠다라고 안심할 때쯤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남편분과 함께 사역은 할 수 없을 것 같고 전도사님만 미취학부에서 함께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전화였습니다.
남편이 함께 못하는 것도 너무 무서운데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이 미취학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남편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그 손을 떼어서 이제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라고 초청하고 계셨음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니 사역자로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지금은 주일 예배 건반으로 또 이곳에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드디어 수많은 무리 속에 끼어 뒤로라도 자리를 잡고 구속사의 말씀이 있는 곳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게 된 곳이 우리들교회 미취학 예배장이었습니다.
충격적이었던 모습이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씀을 집중해서 듣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속사 메시지를 아이들의 언어로 맞추어 직접 만든 교구로 듣기 쉽게 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메시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 메시지는 어른인 나에게도 녹여져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른과 아이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본문 말씀이 전 세대에게 녹아져 그 어느 누구를 만나도 그날의 말씀으로 함께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예배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더 놀라웠던 광경은 다수의 교사 선생님들의 섬김 연수가 평균 10여 년의 시간인 거예요. 각자가 우리들 공동체에 와서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섬김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긴 시간 섬긴다고 생색이 날 만도 싶은데 오히려 봉사하면서 받는 은혜가 더 크고 고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우리 미취학부 선생님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귀한 공동체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매주 배워가던 어느 날, 목회자 세미나에 들어갈 교육부서 영상을 찍는다는 소문이 들리는 거예요. 저는 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내 건 아니겠지 했던 제 영상이 나가게 되었고, 어느 누군가는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지만 그 영상이 저에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떤 시작이었을까요? 제가 말씀드렸지만 저는 살이 찐 이후로 거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니 준비를 하고 화장은 했지만 제가 거울을 보지 않는 것을 인지할 수 없을 만큼 그 환경이 익숙해졌기 때문에 저의 혈루인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제가 사진도 절대 그 시기에는 찍지 않았어요. 저는 제 영상이 나가서 "와 나 인정받았네" 이것이 아니라 큰 화면에 나오는 저를 보며 정말 보기 싫은 나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애써 웃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화면 속에 나오는 저를 계속 직면해야만 했어요. 그때 저는 지난 과거의 사진을 보면 더 우울해지기에 사진을 다 삭제했으면서도 내가 좋아했던 내 모습에 갇혀 살고 있으니 현재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 옛날 모습 속에서 괜찮은 줄 알고 나도 속고 남도 속이며 사는 것이었어요. 또 그 모습을 잊어버리면 내가 살아낼 수 없으니 직면하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직면하게 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과거를 잡고 있으면 현재를 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소문을 듣고 우리들교회를 입성했지만 그 무리들 틈에 끼어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으니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니 이 모습으로 첫 모습을 기억하게 될 이 무리들 틈에 있는 것도 너무 두려워서 화장실에서 숨어 있는 시간들도 많았습니다. 제가 그때 싸워야 했던 마음은 "그만할까, 도망갈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매주 예배 때마다 계속해서 간증을 통해 다시 소문이 들리는 거예요. 구속사 말씀 때문에 바뀌는 환경이 없어도,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바뀌지 않아도 내가 받은 구원 때문에 적용하는 그 성도님들의 소문을 듣기만 했는데, 내 혈루의 근원을 남편과 시댁 탓을 하며 내 죄로 여기지 않았던 제가 이제는 그 혈루의 근원이 내게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었음이 깨달아진 거예요. 내가 죄인이구나. 그 수치의 환경은 내 구원을 위해 100% 옳으신 하나님이 세팅하신 환경임이 인정되었습니다. 남편도 시댁도 내 구원을 위해 수고한 사람들인 것이 인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탓하며 미워하고 분해했던 남편도 시댁도 그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혈루 때문에 예수님의 옷자락이 필요한 자들인 것이 인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혈루증 앓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던 것은 어떤 위험한 상황에 놓일지 알면서도 자신의 처지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얻게 된 여인의 구원은 결코 값싼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담임 목사님께서 우리들 공동체에서 해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붙어만 있어라, 붙어만 있으면 수지 맞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정말 제가 말 그대로 붙어만 있었는데 말씀이 들려지고 들리는 만큼 적용하니 수지 맞는 인생이 되어갔습니다. 말씀대로 붙어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더니 이것이 제 삶의 실제가 되었어요. 정말 은혜인 것은 그렇게 찍었던 영상이 시간이 지나고 제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님이 제8회 목회자 세미나를 들으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구속사의 소문을 듣는 통로가 되는 영상이 되었어요. 어제는 아버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오늘 설교 잘하라고 기도도 해주셨습니다.
언젠가 친한 목사님께서 첫 수요 예배에 말씀을 전하시면서 성도님들에게 질문을 하셨어요. 그런데 그 질문이 임팩트 있게 제 가슴에 항상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마다 다시 저에게 질문해 보곤 합니다. 바로 그 질문은 "성도님들에게 우리들교회는 어떤 의미인가요?"라고 하는 질문이었어요. 그 질문을 오늘 제가 다시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성도님들에게 우리들교회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에게 우리들교회는 바로 예수님의 옷자락이었습니다. 남편이 지원하자고 얘기하지 않았다면 절대 혼자서는 도전하지 못했을 그 시기에 우리 가정의 구원을 위해 소문을 들려준 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담임 목사님께서 들려주시는 구속사의 말씀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시간이었고, 목장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며 집사님들과 함께 나눔을 하는 시간이 옷자락을 붙잡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교회가 저에게 예수님의 옷자락이 되어준 것처럼 오늘 예배에 오신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예수님의 옷자락이 되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 소문을 들려줄 그 한 사람이 되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분노의 혈루와 연민의 혈루로 얼룩져 있던 저를 함께 안아주시고 살려주신 미취학부 공동체를 이렇게 제가 미취학부 헌신예배에서 소개할 수 있는 것은 29절 말씀처럼 좋은 공동체를 만나 혈루의 근원이 마르게 하신 하나님의 세팅인 줄을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우리들 공동체가 예수님의 옷자락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실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미취학부 아이들은 어떻게 예배 드리는지 한번 보시겠습니다.
(미취학부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간증 영상 및 예배 장면)
우리 아이들의 간증이 너무 귀엽지 않나요? 이 영상을 담아주시던 한 사역자님이 저에게 놀라며 물으시는 거예요. "목사님 신기한 게 있어요. 아니 부모님들 혈루가 어떻게 이렇게 다 똑같지? 혈기예요." 이분은 결혼은 하셨지만 아직 자녀는 없으세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맞지 이때는 혈기밖에 날 게 없는 때지. 남편이 일찍 안 와서 혈기가 나고, 남편은 또 언제 오냐는 연락에 혈기가 나고, 내가 지금 놀고 있냐고 혈기가 나고, 그럼 엄마는 또 나는 집에서 놀았냐고 혈기가 나고, 애는 나만 키우냐고 혈기가 나서 계속 혈기가 날 것밖에 없다." 잠 안 자는 아이 때문에 또 혈기가 나죠.
그런데 이 시기에 엄마들에게 또 마르지 않는 혈루는 죄책감의 혈루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하는 엄마는 내가 집에 있으면 그 시간에 아이 눈을 마주치고 놀아줄 것 같고 이렇게 정서적으로 뭔가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또 가정에서 육아하는 엄마는 아 내가 나가서 돈이라도 벌면 우리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데 못 해주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그렇게 하루 동안 혈기했던 우리의 모습이 생각나서 잠든 아이를 보면 또 저희는 어떻게 하죠? 잠든 아이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또 울어요. 그리고 부족한 나만 이렇게 부족한 것 같아서 이렇게 또 울면서 연민의 혈루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 옷자락을 붙잡으면서 회개를 해야 하는데, 죄인인 우리는 또 연민의 혈루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영상에 나온 우리 부모님들이 최고의 부모인 것은 주님을 만난 거예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겁니다. 내 혈루가 뭐냐고 물을 때 답할 수 있잖아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부모학교를 섬기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은혜가 되었던 것은 어린 시절을 키우는 부모가 아니라 정말 저 같은 다 큰 성인을 키워놓은 부모님이, 그것도 아버님이 오셔서 등록을 하신 거예요.
이유를 물어봤더니 우리들교회에 와서 이제 말씀을 들으면서 본인이 정말 문제 부모였음이 인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일하느라 바쁘고 마음을 봐줘야 하는 거는 생각도 못 했었던 시절이었는데, 이제 다 커버린 자녀와 대화를 하려고 보니 이미 멀어져 버린 자녀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배우고 싶어서 오셨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적용인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항상 못 해줘서 미안하고 좋은 부모가 아닌 것 같아서 미안하고, 또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각종 세미나를 찾아다니며 듣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3월에 열리는 부모학교가 있습니다. 지역 사회에도 열려 있으니 우리들교회 소문을 많이 많이 내주셔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우리들 공동체에 옷자락을 잡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많이 많이 알려주세요.
제가 부모가 되기 전에 청년들과 상담을 하면 거의 자녀들의 입장으로 이해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미취학에서도 주일에 아이들이 오면 너무 귀여운 아이들만 반가이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돼 보니까 작정하고 상처를 주려고 하는 건 없더라고요. 부모도 그저 100% 죄인이기에 예수님의 옷자락이 필요한 자일 뿐입니다. 청년들과 대화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미취학에서도 귀여운 이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서 주일날 아침부터 고군분투하면서 왔을 부모님의 수고가 보이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 목사님의 말씀처럼 좋은 부모 나쁜 부모 없습니다. 우리 미취학 아이들의 고백처럼 예수님 믿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그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 이번 설 명절 우리 부모님들에게 꼭 들려주시는 인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정말 좋은 부모는 우리들 공동체를 붙잡을 수 있도록 이 공동체를 지켜주시고 떠나지 않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내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예배를 잡고 목장을 잡고 교회 안에서 열리는 양육의 손을 잡는 뒷모습을 보며 자라나는 것이 우리 아이들에게 최고의 양육인 줄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내 혈루를 고쳐줄 것 같아 찾아다니며 잡으려는 것은 무엇인가요? 설 명절 만나게 될 부모님에게 "예수님 믿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백해 볼까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는 적용으로 3월부터 열리는 교회 안의 각종 양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시겠습니까?
평안히 가려면 셋째, 모든 사실을 여쭈어야 해요.
32절, 3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님께서 이 혈루증 앓는 여인의 접촉에 대해서만 특별하게 생각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그렇게 밀치고 밀리며 예수님의 옷을 스치고 몸이 닿았지만, 마음을 예수님에게 댄 사람은 오직 혈루증 여인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담임 목사님께서도 구속사의 말씀을 목놓아 외쳐도 수많은 무리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말씀을 듣지만, 정말 그 혈루의 근원을 아는 한 사람이 말씀이 닿아서 공동체에 붙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 한 사람이 접붙여져서 가정을 살려내고 나라를 살려내는 거예요. 미취학부터 구속사 말씀을 듣는 우리 아이들이 취학부, 청소년부, 청년부를 지나며 그런 한 사람이 될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손을 대었냐고 물어만 보셨는데, 자신이 손을 댄 이유뿐만이 아니라 곧바로 나은 사실까지 이야기하며 예수님의 능력을 간증합니다. 그래서 그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이 놀라운 일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줄도 몰랐던 것을 여인의 고백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제가 처음 말씀드렸던 그 회당장의 딸, 죽은 소녀를 살리기 위해 가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감지하여 소녀의 소생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역할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렇게 살아난 한 사람의 간증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 그 간증을 듣는 나에게도 구원의 이야기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평안한 삶은 이제 좋은 공동체 만나서 나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그 수치라 여겼던 그 시간들을 꺼내어 이야기하며 내게 구원을 주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좋은 공동체를 만나면 방황이 끝난다고 하셨는데 좋은 공동체를 만나니 혈루가 끊어졌습니다. 예배를 잡고 목장을 잡고 양육을 잡았을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어요.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 하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러 가신 것처럼, 오늘 예배에 오신 한 분 한 분에게 평안히 가라는 음성을 듣고 여러분의 살아난 이야기로 만나러 갈 가족들에게 살리러 가는 발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적용 질문 드리겠습니다. 내 혈루는 마를 수 없다고 여쭈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설 명절 내가 만날 가족들에게 내 간증을 할 수 있나요? 설 명절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가족들에게 평안히 가려면 나는 어떤 적용을 해야 할까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평안히 가려면 첫째, 내가 혈루증 앓는 여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그의 옷에 손을 대어야 합니다. 셋째, 모든 사실을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이 바로 저였음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노와 원망의 혈루로 나도 죽고 남도 죽이며 그렇게 죽을 뻔한 인생에게 구원을 주시려 우리들 공동체의 소문을 듣게 하셨습니다. 내가 만족하는 환경과 모습이 아닌 수치스러운 환경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웠던 제가 예배를 붙잡고 공동체를 붙잡았을 뿐인데 구원을 주시고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여 주시니 이 자리에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두렵고 떨림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려워 어둠 가운데 갇혀 있는 우리 가족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적인 힘으로 고쳐보려 재물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시고 구속사의 소문을 들으러 마지막으로 예배에 나가보자고 권면하는 그 한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그 잡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가족이 함께하는 이 명절에 예수 믿게 해준 부모가 최고의 부모라고 고백하는 명절이 될 수 있도록 주님 도와주시고 가정이 깨어지고 마음이 깨어진 가정에 나의 간증으로 구원을 전할 수 있도록, 각 사연으로 혼자 보내야 하는 그 한 사람이 있다면 주님 멈추어서 여인을 바라봐 주셨던 것처럼 공동체가 있기에 외롭지 않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담임 목사님 기억하여 주셔서 구속사의 소문이 두바이 땅과 유럽 땅 곳곳에 들려질 수 있도록,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다음 세대가 예수님을 모르는 세대가 되지 않도록 주님 지켜 주시옵소서. 혈루의 근원이 마름에 평안히 가라고 하신 말씀에 감사하여 드리는 이 예물을 주님 받아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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